1998~2001년까지 남성웹진 Menslife라는 웹사이트가 있었습니다. 십여년전 추억의 기사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멘스라이프 기사를 심퍼니(Simfuuny)에서 다시 포스팅합니다. 2000년 9월의 기사입니다.

 

 


 미스터코리아 대회의 50년 역사


지난호에서 미스코리아대회의 방송중단으로 아쉬워하며 부르짖었던 미스터코리아 대회 생방송을 다시금 상기시키며 미스터코리아의 역사를 간략하게 되짚어 본다.  1949년 12월 4일 명동 시공관에서 개최되었던 제 1회 미스터 코리아 선발대회는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최초의 보디빌딩 행사로서 경제적으로 우리보다 앞선 일본보다 무려 6년이나 먼저 개최된 스포츠 행사였다.

 

초대 미스터코리아로서는 YMCA소속의 조순동 선수가 차지하였으며, 제2회 대회부터 제6회 대회까지는 6.25사변으로 대회를 치루지 못하고, 제7회 전국 체육대회가 열렸던 곳인 전라남도 광주시 서중학교에서 1955년 12월 18일 개최되어 홍정식 선수가 미스터 코리아로 선발되었다. 그후 협회 사정으로 8회 9회 경기가 치루어지지 않다가 제10회 대회는 서울 동화극장에서 1958년 10월 14일에 열려 현 대한보디빌딩협회 김덕현 부회장이 종합 우승을 하였다. 1960년대 말까지 21회의 미스터 코리아 선발대회를 치루면서 우리나라의 보디빌딩은 더욱 발전 되어 갔다.

 

 

그후 한해도 빠짐없이 치루어진 이 행사는 어느 종목보다도 여사와 뿌리가 깊고 전통있는 연중 행사로 자리 잡았으며 동양권에서는 가장 먼저 보디빌딩을 보급한 선구자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1979년부터는 신장으로 구분짓던 단신부,중신부,장신부의 3체급에서 밴텀급,라이트급,미들급,라이트헤비급,헤비급등 5개 체급으로나뉘어 선수들이 신장에 관계없이 체급을 자유럽게 선택할수 있었다 이 시기는 보디빌딩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보디빌디인구의 저변확대와 헬스 인구의 수가 증대, 경제성장과 함께 건강의 중요함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스터 코리아 출신으로 대한역도연맹 보디빌딩 분과 원원장이던 김용운씨가 오랜기간 보디빌딩 행사 개최와 예산집행을 이끌어 왔으나 84년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80년대에는 아시아 보디빌딩 선수권대회에서 몇번에 걸쳐 종합우승을 하였으며 호주에서 개최된 세계보디빌딩 선수권대회에서는 한국이 종합 3위에 오르는 영광을 갖기도 했다. 특히 박영철선수는 82년 일본 동경에서 열린 제18회 아시아 보디빌딩 선수권대회에서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한국 보디빌딩이 국제 무대에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또한 84년도 미스터코리아인 한동기 선수는 월드게임에서 1위,세계선수권대회에서 1위를 차지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최고의 선수로 평가되고 있으며 지금도 현역선수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 뒤를 이어 89년도 미스터코리아 김준호 선수는 여세를 몰아 그해 브라질에서 열린 세계주니어 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함으로써 앞으로 한국 보디빌딩의 큰재목으로 성장할것을 예고했었다.

 

90년 10월에 개최된 제71회 전국체육대회에서는 처음으로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어 휴양도시인 충청북도 수안보에서 성대하게 행사를 치루었다. 91년도 에는 전북이리에서 두번째로 시범종목으로 선보여 보디빌딩의 관심이 늘어나 어느 경기보다도 많은 관중과 열기로 가득 찼었다. 두번에 걸친 시범경기로 대한체육회로부터 완벽한 경기 종목이라는 평가를 받아 92년도 부터는 정식종목으로 채택 되었다. 이제 보디빌딩은 전국 15개 시도가 종합순위를 놓고 경합을 벌이게 되었으며, 대학에서는 우수선수를 스카웃하는 인기스포츠로 탈바꿈하였다. 93년도 11월에는 세계60여개국이 참가한 제47회 세계보디빌딩 선수권대회를 서울에서 유치해 한국이 금메달2개 종합2위라는 기록을 세웠다. (2000.9 menslife)

 

posted by max7st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