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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말실수보다 불편한 진실이 더 무서운 사람들: 위선의 평등주의를 말하다

-한국 언론과 잡스런 단체들의 위선적 평등주의에 보내는 경의


어떤(?) 정치평론가의 발언이 언론과 단체들에 의해 단두대 위로 올려졌다. 이른바 ‘여성 비하’와 ‘학력 차별’이라는 고루한 깃발을 흔들면서 말이다. 그러나 정작 그 발언이 나온 맥락, 즉 ‘그 대선후보의 부인’이 먼저 뱉은, 노동자에 대한 평가절하적 발언은 어찌된 일인지 어물쩍 묻혔다. 뭐 언제나 그렇다. 사냥감이 정해지면 사냥개들은 짖는다. 누가 먼저 총을 쐈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저 피가 흘렀다는 사실만이 필요할 뿐이다. 자, 이제 이 위선의 향연에 박수를 보내며 하나씩 찬미해보자.


1. 노동자를 비하했다고? 문제의 시발점은 ‘그 대선후보의 부인’이었다. 기-승-전-책임전가의 묘수, 너무나 감탄스럽다.

평론가의 말 한마디에 벌떼같이 달려들며 “노동자 비하!”를 외친 이들이 묘하게 얼렁뚱땅, 미지근하게 지나친 장면이 있다. 바로 그 후보자 부인의 “노조는 못생겼다. 나는 예쁘고 부드럽다”라는 발언이다. 한 마디로 노동운동은 투박하고 추하며, 본인은 그와 정반대의 존재라는, 그야말로 자신이 출신을 부정하는 소개였다. 그러나 이 말을 심각하게 문제 삼은 언론은 별로 없었다. 왜일까?
 
이쯤 되면 정말 물어보고 싶다. 노동자에 대한 편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발언은 후보자의 부인에게서 나왔는데, 왜 그에 대한 비판은 미지근했고, 그 발언을 비꼰 평론가는 불지옥행인가? 도덕적 기준이란 것이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적용되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유연할 줄은 몰랐다.
 
이런 유연함, 이런 편파성, 이런 ‘결과만 놓고 때리는’  매우 한국적인 편가르기의 정점에 있는 매체를 향해서 손가락 하나 길게 뽑아서 박수를 친다. 누가 옳고 그른가는 중요치 않다. 누가 현재 제일 핫한 미끼이고, 누가 대중의 눈 밖에 났는가가매체들의 윤리 기준이다. 심지어 그 윤리는 하루에도 열두 번 변신이 가능하다. 감탄할 일이다, 정말로.


2. 학력차별이 없다고? 그런 헛소리를 하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꿈속에서나 살아라.

자, 이제 “학력 차별이다!”라는 공격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평론가는 "학벌좋은 남자랑 결혼을 해서, 대선 후보가 된 남편 덕분에 지금 붕 떠있는 상태다'라는 식의 발언이다. 물론 문제가 되는 심한 표현도 있다. 그런데, 고졸 여성 노동자가 서울대 출신 남성과 결혼해 훗날 영부인 후보(?)가 되었다면, 과연 누구 덕에 인생의 궤도가 바뀌었는지를 되묻고 싶다. 이런 물음조차 허용되지 않는 건가?
 
서울대 출신 운동권 청년이 20대 시절, 고졸 노동자였던 그녀를 보고 “예쁘고, 문학적이고, 부드럽다”고 생각해 결혼을 결심했다면, 이미 그 순간 선택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간 것이다. 미안하지만 이건 신분상승의 전형이다. 연애니 사랑이니 포장해봤자 구조는 명확하다. 그런데 이걸 지적하면 “차별”이라니? 거짓말도 적당히 하라.
 
정 반대로, 만약 고졸 남성이 서울대 출신의 여성 정치인을 만나 그녀의 덕에 대통령 부군 후보(?)가 된다면, 평론가의 발언에 대해 같은 맥락의 비판이 들끓었을까? 하등의 가능성도 없다. 오히려 “사랑에는 신분이 없다”느니, “성실한 남편의 뒷바라지 덕분”이니 하면서 미화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니까 이 모든 소동은, 남성이 더 학벌이 높고 사회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을 때만 ‘차별’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아주 편리한 이중잣대에서 비롯된다. 이 얼마나 정교하고 정성스럽게 잘 구축된 위선인가. 진심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3. 말실수는 모두가 한다. 뱉은 말 주워담는 건 정치권의 일상이다. 문제는 그걸 먹잇감 삼는 이들이다.

후보자의 부인도, 평론가도 말실수를 할 수 있다. 사람은 말을 하다가 삐끗할 수 있고, 분위기에 따라 과장되거나 부주의한 발언을 할 수도 있다. 그런 일이 정치판에서 일어나면? 대개는 이렇게 처리된다: “그건 맥락이 왜곡된 것이다.” 또는 “그 부분은 유감이다.” 혹은 “앞으로 조심하겠다.” 그리고 며칠 지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넘어간다.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고? 웃기는 소리다. 이 나라 정치판은 토사물도 주워먹는 수준의 기억력으로 굴러간다. 하루가 멀다 하고 누군가 말실수를 하고, 그에 대한 시원찮은 해명과 진정성 없는 사과가 반복된다. 누군가는 “죽창을 들자” 하고, 누군가는 “개, 돼지”라 하고, 누군가는 진절머리 나는 지역비하를 내뱉고도 살아남는다.
 
그런데 이번엔 왜 이렇게 달려들었을까? 간단하다. 먹잇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론가는 정치권에 속하지 않는 외부자이자, 비판해도 부담 없는 인물이다. 거기다 “비하”라는 태그까지 붙여놓으면 완벽한 타깃이 된다. 정치권과 언론, 이상한 단체들의 삼위일체적 공격 본능이 작동한 것이다.
 
더 나아가야 한다. 이 나라가 제대로 서려면, 이런 이중잣대와 표리부동한 도덕성을 업으로 삼는 자들을 해체해야 한다. 평등이란 말만 꺼내면 침을 튀기며 설교하던 이들이 정작 자기들의 이익에 맞지 않으면 침묵하거나 왜곡하는 행태, 그게 이 나라의 정치적 내전과 도덕적 파산을 부추긴다. 차라리 “우리는 우리 편만 옳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솔직히 선언하라. 그 편이 훨씬 정직하고 상쾌할 테니까.


맺음: 이 잔혹한 위선의 연극에 경의를 표한다

평론에는 당연히 호불호가 나뉜다. 평론가는 자신도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가 알면서도 침묵하는 것, 우리가 보면서도 외면하는 것을 진영을 갈라서 공공연하게 비판하고 수익을 얻었으면 긁히는 누군가에게 욕을 먹는 건 당연하다. 하루가 멀다하고 내놓은 그의 말들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놈의 나라는 같은 말에 열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불편해 미칠 지경에 이르러서 한바탕 욕을 뱉고 심리적 안정감을 얻기도 하니까.
 
우측이든, 좌측이든 평론가들의 지적은 상대편의 위선을 찔렀고, 대중은 반사적으로 그를 희생양 삼아 안정을 되찾았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희생양 구조인가. 이런 구조가 험악해진다면, 누군가 또 나서서 진실을 말하기 전에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영원히 ‘불편한 진실’은 외면하고 ‘기분 좋은 거짓’만을 품은 채, 안락한 도덕적 자위 속에 살 수 있을 것이다. 묻고 싶다. 과연 그게 더 나은 사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