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자유에 취한 인간들의 말장난에 대하여
1. “하고 싶다”와 “하기 싫다” 사이에서
— 개인 성향인가, 문화적 노이로제인가
그냥 대놓고 물어보자. “당신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고 싶습니까? 아니면 하기 싫은 건 안 하면서 살고 싶습니까?”
질문은 간단하지만 꽤 그럴싸해 보인다. 마치 둘 중 하나만 고르면 무릎이 탁 쳐질 만큼 인생이 명확해질 것 같지만, 실상은 인간의 비루한 자기합리화가 첨예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사람의 성향이라기보다는, 얼마나 현실에 찌들었는지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에 가깝다. 이상에 허우적대는 사람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겠다”고 답한다. 자신의 욕망이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착각 속에서 산다. 반면, 현실의 쓴맛을 너무 많이 본 사람은 “하기 싫은 걸 안 하며 살겠다”고 한다. 욕망보다는 혐오와 피로에서 비롯된 소극적 선택이다.
문화적 배경도 한몫한다. 어릴 때부터 “너는 특별해”라는 기만적 주문을 들으며 자란 사람은 ‘하고 싶은 것’에 집착한다. 반면 한국처럼 “넌 남보다 뒤처지면 끝이야”라는 공포 교육을 받은 이들은 하기 싫은 걸 어떻게든 회피하며 사는 데 능하다. 우리는 자율적 삶이 아니라 생존형 피로 누적으로 살아온 민족이다.

2. 둘 중 더 나은 행복은 무엇인가
— ‘하고 싶다’는 허상이고, ‘하기 싫다’는 해방이다
‘하고 싶은 걸 한다’는 말은 그럴듯하다. 창조적이고 자유롭고, 자신에게 충실한 인생처럼 들린다. 하지만 여기엔 전제가 붙는다.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능력과 조건이 있을 때만”. 그것이 없다면 이 말은 그냥 한낱 유튜브 자막일 뿐이다. 하고 싶은 걸 하려다 월세 밀리는 날, 현실은 냉정하게 귓방망이를 날린다.
반면 ‘하기 싫은 걸 안 한다’는 선택은 훨씬 더 현실적이다. 거기엔 최소한 자기 존엄의 선이 존재한다. 직장 상사의 꼰대짓, 가족 안에서의 억지 희생, 사회가 요구하는 억지 감정노동을 거부하는 것. 그것이 비로소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최소한의 선이다.
하기 싫은 걸 안 하는 삶은, 쓸모 있는 욕망보다 더 본질적이다. 욕망은 시대와 함께 변하고, 언제나 남과의 비교 속에서 조정된다. 하지만 혐오와 피로는 아주 구체적이고 명료하다. 나는 이걸 하고 싶다는 생각보다, 이건 진짜 못 하겠다는 감정이 훨씬 인간적이다.
그러므로 ‘하고 싶은 걸 하는 것’은 환상이지만, ‘하기 싫은 걸 안 하는 것’은 자유다. 우리가 진정 바라는 건 자유이지 욕망의 실현이 아니다. 욕망은 타인이 심어준 판타지일 뿐이다. 해방은 스스로 판 타인의 기대를 부숴버리는 행위다.
3. 세대별 선호의 변화
— 젊은 세대는 ‘탈출’을 원하고, 중장년은 ‘버티기’를 한다
이제 이 질문을 세대별로 살펴보자.
20대는 ‘하고 싶은 것’을 외친다. 물론 속으론 현실을 나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면서도 이상을 말하지 않으면 쪽팔릴 것 같은 심정이 깔려 있다. 30대는 갈팡질팡한다. 결혼이냐, 이직이냐, 육아냐, 커리어냐.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하기 싫은 것도 많은 이 나이대는, 결국 야근을 마치고 맥주 한 캔 따며 결정을 거부하는 것으로 시크한 척 할 것이다.
40대는 ‘하기 싫은 걸 안 하는 법’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스트레스로 건강검진에서 수치가 이상하게 나오기 시작하고, 인간관계의 허상도 깨우치는 시기이니 그럴만 하다. 50대 이후는 명확하다. “이젠 나도 좀 안 하고 살자”가 내면의 슬로건이다. 인생을 50년이나 살아보니, 하고 싶은 건 늘 남의 인생에 껴 있고, 안 하고 싶은 것만 내 인생에 차곡차곡 쌓인다는 걸 안다. 이 나이쯤 되면, 욕망보다 거부가 훨씬 힘 있는 언어가 된다.
흥미로운 건, 나이 들수록 ‘하고 싶은 걸 한다’는 발상이 점점 유치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어린애들이 ‘난 커서 대통령 될래요’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인생을 오래 살아본 사람일수록, 가장 큰 사치는 ‘안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체화한다.
4. 한국인의 선택은 유난히 절박하다
— 경쟁사회가 만든 ‘회피의 미학’과 비루한 체념
자, 이 질문을 한국 사회에 던져보자. 대부분은 “하기 싫은 걸 안 하는 게 더 좋겠다”고 말할 것이다. 왜냐고? 한국은 ‘하고 싶은 걸 하면 망한다’는 불문율이 통용되는 사회다. 하고 싶은 걸 하다가 부모 등골 빼먹거나, 창업하다 말아먹거나, 결혼 포기하거나, 도태된다.
이 나라에서 '하고 싶은 걸 한다'는 말은 무책임함과 동의어가 된다. 누군가 꿈을 말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현실을 봐라”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하고 싶은 걸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실제론 하기 싫은 걸 참고 견디는 데 익숙해졌다. 슬픈 내성이다.
이 나라는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능력’보다 ‘하기 싫은 걸 참고 견디는 능력’을 더 높이 평가한다. 입시경쟁, 취업전쟁에 찌들고, 야근과 허접스러운 상사을 견디는 사람을 “참 대단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결국, 행복이란 이름으로 우리가 떠안은 건 고통의 연속이다.
결론: 진짜 행복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거부하느냐'다
— 피로사회에서 내려오는 유일한 방법
2025년에도 우리는 온갖 헛소리와 자기계발 강의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당신도 할 수 있다', '당신의 열정을 펼쳐라' 같은 위선적인 말들이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고 흘러나온다. 하지만 진실은 간단하다.
행복은 무엇을 하느냐보다, 무엇을 하지 않을지를 결정할 수 있을 때 찾아온다.
하고 싶은 걸 하겠다는 사람들은 늘 어딘가 ‘자기 인생을 설명하려는’ 강박에 시달린다. 반면 하기 싫은 걸 안 하고 사는 사람들은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산다. 불필요한 것을 걷어내고, 타인의 기대와 비교를 끊고, 자기 삶의 진짜 주도권을 갖는다. 인생은 하고 싶은 걸 다 해보기엔 짧고, 하기 싫은 걸 다 참기엔 너무 길다. 그렇다면 선택은 뻔하다.
“안 하는 삶”이야말로 진짜 인간다운 삶이다.
그래서 '시바한잔해'는 오늘도 혼술하면서 다짐한다. '하기 싫은 건 안 하고 살기 위해, 나머지를 다 내려놓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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