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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2025년 한국 : 수치심을 잃은 사회, 그 위에서 웃는 자들

수치심을 정신분석사전에서 찾아보니,

 

수치심은 '거부되고, 조롱당하고, 노출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한다는 고통스런 정서'를 가리키는 용어란다.  당혹스러움, 굴욕감, 치욕, 불명예와 같은 것들도 수치심 포함되고, 오만함, 거만함 그리고 철수 같은 태도들은 수치심에 대한 반동 형성이라고... 그리고, 수치심에 대한 느낌은 외부로 전가되기 쉬운데, 자신이 관찰되고, 염탐되고, 통제된다는 망상으로 변할 수도 있다고. -이거 완전히 작년 12월 이후 한국 권력층의 모습을 설명하는 듯한...

 

인간은 얼굴이 붉어지는 유일한 종으로, 다윈은 ''인간의 모든 표현 가운데 가장 특별하고 가장 인간적인 것''이라고 했다는데,. 왜 작금의 이나라 정치인과 권력층은 인간이길 거부하는 건가?

 

 

수치심을 잃은 사회, 그 위에서 웃는 자들

(2025년이 아니라 상당히 오랫동안 이어져 온 작태지만) 이 나라 정치판을 들여다보면, 마치 쓸모없는 거울을 보는 듯하다. 단, 그 거울은 깨진 파편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무엇 하나 온전하게 비춰지는 것이 없다. 정치인과 권력층의 행태는 이제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국민은 수십 년간 그들의 파렴치함에 익숙해졌고, 그들은 이 익숙함을 빌미 삼아 더욱 대담해졌다.

 

정치인의 거지말은 기술이 아니라 의식

거짓말은 이제 기술이 아니라 의례적인 의식이 되었다. 어제 한 말을 오늘 부정하고, 내일이면 또 다른 진실을 말하는 정치인들. 이들의 뻔뻔함은 감탄을 넘어 경악에 이르게 한다. 마치 진실은 상황에 따라 바꿔 입는 양복처럼 여겨지는 듯하다. "그건 그런 뜻이 아니었다", "정확한 워딩은 그게 아니다", "언론이 왜곡했다"는 익숙한 레퍼토리는, 마치 똑같은 대본을 들고 돌아가며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코미디가 아니라, 국민의 삶과 직결된 리얼리티라는 점에서 처절하다. 

 

내 편이면 범죄도 의리, 네 편이면 실수도 범죄

 

국회의원이라는 작자들이나 권력층이나 하나같이 똑같다. 좌우 가릴것도 없다. 그들은 라이벌의 작은 실수나 사소한 비리는 확대경으로 들여다보고, 언론을 동원해 난도질하며 스스로 정의의 칼날인 척 흉내 낸다. 반면, 자기 진영의 부패와 비리, 혹은 명백한 잘못에 대해서는 궤변과 물타기로 일관한다. 선택적 분노, 편의적 정의, 그리고 끝없는 자기 합리화. 이런 위선의 퍼레이드는 도무지 끝날 줄을 모른다. 진영 논리 속에서 ‘내 편이면 범죄도 의리, 네 편이면 실수도 범죄’이라는 괴상한 윤리 기준이 당연시된다.

적절한 긴장감이 아니라 완전 쪼개지는 판이다. (챗지피티)

 

갈라치기 전성시대

더욱 한심한 건, 국론 통합이라는 말은 말뿐이고, 실제로는 갈라치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념과 세대를 인위적으로 쪼개고, 분열을 부추기며 그 틈에서 반사이익을 챙긴다. 노인층을 선동해 젊은 세대를 혐오하게 만들고, 청년층에게는 기성세대를 조롱하라고 부추긴다. 진보냐 보수냐는 이제 정책의 방향이 아니라 혐오의 깃발이 되었고, 선거철마다 이 깃발 아래에서 조작된 분노가 넘실댄다. 국가는 점점 증오로 조각나고, 정치인은 그 조각 위에서 권력을 쥐고 춤춘다.

 

문제는 그 위에서 자라나는 다음 세대다.  어른들의 세계를 보며 수치심을 배운 적도, 가져본 적도 없이 자란 이들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성공’이야말로 이 사회의 정답이라 믿게 된다. 부정과 탈법, 위선과 거짓이 승리하는 풍경은 청년들에게 ‘성공하려면 정의 따위는 집어치워야 한다’는 교훈을 각인시킨다. 결국, 권력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고, 그 권력을 쥐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형들이 만들어진다. 우리가 욕하던 기성 정치인의 모습이 다음 세대에서 복제되고 있는 셈이다.

 

정치인이 가장 큰 장애물이다

대한민국의 진짜 위기는 경제도, 외교도 아니다. 부끄러움을 잃은 사회, 거짓을 반복하며도 당당한 정치인과 권력자들, 그리고 그들을 닮아가는 청년들. 이 수치심의 실종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위기다. 반성과 진실이 실종된 시대에, 누가 감히 다음 세대를 탓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