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하려면 워라밸을 버려라."
유명 셰프의 말이다. 물론 셰프 한 명의 소신이라 치부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말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그런 말은 낯설지 않다. 이미 수많은 책과 컬럼에서 똑같은 논조로 말해왔다. '성공'을 위해서는 잠을 줄이고, 친구를 버리고, 연애를 미루고, 야근을 견디고, 병을 참고, 욕을 먹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미친 듯이’ 달려가면 결국엔 빛나는 정상에서 남들과는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다는 환상을 팔았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성공'이란 무엇인가. ‘성공’이란 말은 복합적이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재력, 권력, 사랑, 자유, 행복 이 다섯 가지를 그 기준으로 삼는다. 문제는 이 다섯 가지 모두를 획득하기 위해선 결국 '워라밸'을 희생해야 한다는 전제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회에 박혀 있다는 점이다. 여기, 그 어두운 로직의 실체를 해부해 본다.
1. 돈은 시간의 시체 위에 쌓인다 — 재력의 이면
재력을 얻기 위해선 일단 '시간'을 팔아야 한다. 하루 24시간 중 몇 시간을 ‘일’에 바치느냐에 따라 월급이 달라진다. 시간당 단가가 높은 전문직도 마찬가지다. 단가가 높으면, 책임과 리스크는 더 커진다. 실수 한 번이면 수천만 원이 날아간다.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그래서 부자는 대부분 ‘쉴 줄 모르는 인간’으로 길들여진다.
한국 사회는 더더욱 그렇다. 치열한 입시, 장시간 노동, 주말 없는 프로젝트. ‘성공’하려면 타인의 여가 시간에 자신의 커리어를 확장해야 한다. 친구가 여유롭게 커피 마실 때, 당신은 회계 보고서를 다시 뜯어봐야 한다. 누군가가 일찍 퇴근할 때, 당신은 상사의 DM을 눈치 보며 야근을 선택해야 한다. 결국 돈이란 건, 수많은 주말과 저녁을 죽이고 쌓은 시체 위에 겨우 올라앉는 것이다.
재력이 생기면 시간의 여유가 생긴다고? 웃기지 마라. 오히려 재력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한다. 돈은 절대 ‘워라밸’을 되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영원히 저당 잡힌다.
2. 권력은 관계의 피를 먹고 자란다 — 권력의 착취 메커니즘
권력은 고립의 대가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사람을 믿지 못한다. 내부의 충성도 시험하고, 외부의 시선을 견뎌야 한다. 팀장의 자리는 단순히 직급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삶을 쥐고 흔드는 자리다. 그 자리엔 ‘사적인 인간성’이 들어설 틈이 없다.
권력 있는 자는 인간관계를 수단화한다. 동료는 경쟁자가 되고, 부하는 도구가 된다. 인간적 신뢰를 기반으로 한 ‘생활’은 이 관계망 속에서 무너진다. 권력을 유지하려면, 사생활이 희생된다. 연인과의 저녁 식사? 가족과의 주말 나들이? 모두 일정 조율이라는 고통의 도마에 올라온다.
게다가 권력은 끊임없이 시험당한다. 높은 자리에 앉은 당신은 늘 다른 누군가에게 위협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방어해야 하고, 스스로를 포장해야 한다. 그 결과, 권력자는 결국 ‘자신조차 못 믿는 인간’이 된다. 워라밸? 인간성을 포기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도달하는 환상일 뿐이다.
3. 사랑은 의무가 되고, 감정은 무기화된다 — 사랑의 피로사회
많은 이들이 말한다. "돈이 있어야 사랑도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정작 ‘성공한 자’는 사랑을 유지할 여유가 없다. 감정노동은 물리적 노동보다 피로하다. 애정이란 건 돌봄의 시간과 대화의 여유를 먹고 자란다. 그러나 성공한 이들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다.
사랑은 결국 프로젝트가 된다. 생일도, 기념일도, 대화도 모두 스케줄러에 적힌 ‘업무’가 된다. 진심을 담은 대화는 없어지고, 효율적으로 상황을 정리하는 능력만 남는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요구사항을 처리하는 행위로 전락한다.
게다가 성공한 이의 감정은 늘 대상화된다. “성공했는데 왜 외로워?”라는 질문이 돌아온다. 그들에게 ‘외로움’이란 감정은 누릴 자격조차 없는 사치가 된다. 감정 표현은 이해받기보다는 공격받는다. 성공하면 사랑도 쉬워진다는 환상은, 결국 누군가의 감정노동을 갈아넣은 착취의 결과일 뿐이다.
4. 자유란 선택지가 아니라 책임의 변종이다 — 자유의 모순
‘성공하면 자유롭다’는 말만큼 공허한 문장은 없다. 성공한 사람에게 자유란 절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해야 할 것을 자율적으로 강요당하는 것’이다. 즉, 자기착취의 정점이다.
회사를 창업한 대표는 출근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매출’이라는 숫자 앞에서 무력해진다. 공무원 시험을 통과한 이에게는 정년 보장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조직 논리 안에서 ‘지시를 거부할 자유’는 없다. 작가나 예술가처럼 비교적 자율적인 직업군조차도 ‘팔리는 콘텐츠’를 위한 자유만이 허용된다. 시장의 선택을 벗어난 자유는 곧 무명의 추락이다.
결국 성공이 주는 자유란, 자유의 이름을 한 ‘책임의 노예 상태’에 가깝다. 진짜 자유는 무명의 소시민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때 잠시 스쳐 지나가는 그 평범한 순간에만 존재한다. 워라밸? 자유의 기초다. 그러나 성공은 그 기초부터 철저히 부숴야만 얻는 것이다.
5. 행복은 남의 시선을 먹고 자란다 — 행복의 외주화
성공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행복은 너무 자주 ‘보여지는 행복’이다. SNS에 올릴 수 있는 사진, 언론에 나갈 수 있는 인터뷰, 상장과 명패, 수치화된 성과들. 이 모든 것이 ‘행복의 증거’로 사용된다. 진짜 문제는 이것이 곧 ‘행복 자체’로 오해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감정의 외주화일 뿐이다. 진짜 행복은 내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오늘 하루 무탈하게 지나갔다는 평온함, 커피 한 잔의 여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는 여백. 그러나 성공을 좇는 인간에게는 그런 감각이 점점 무뎌진다. 감각이 무뎌지면, 그 자리를 ‘인정 욕구’가 채운다. 그리고 그 욕구는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
워라밸은 행복의 가장 작은 토양이다. 하지만 한국식 성공이란 그 토양을 태워버리고, 불모지 위에 네온사인을 세우는 일이다. 번쩍거릴 뿐, 생명은 자라지 않는다.
맺으며: 워라밸을 버려야만 얻는 ‘성공’이 정말 성공인가?
성공을 위해 워라밸을 버리라고 말하는 사회. 그것은 실은 ‘균형을 포기한 자만이 살아남는 사회’다. 일과 삶의 균형이란 사치가 아니라, 인간성을 지키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러나 한국은 그 최소한마저도 경쟁 앞에 내던졌다.
이제 우리는 묻고 반문해야 한다.
성공이란 무엇인가?
그 성공이 삶을 파괴하면서까지 추구할 가치가 있는가? 아니면, 성공이란 단어 자체가 실은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조작된 신화는 아닐까? 워라밸을 포기하고 얻은 그 무언가가 진짜 당신의 것인지, 아니면 당신을 소모해 만든 상품인지, 지금 다시 돌아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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