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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좌왕

신에게 무관심한 자, 조용한 무신론자를 귀찮게 하는 시대에 대한 유감

(어느 종교도 관심없는, 아무 것도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의 혼술잡담. 종교인 비하 아님.)



 
“신앙이 없는 사람은 불쌍하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내가 무슨 암이라도 걸렸나 싶었다. 표정은 친절하지만 눈빛은 연민으로 흐릿한 그 말은, 꼭 무언가 중대한 삶의 조각을 잃어버린 채, 어딘가에 방치되어 있는 사람처럼 묘사한다. 

(자타가 독실한 신앙인이라고 평하는) 그들은 말한다. “신이 당신을 사랑하신대요.”
고맙다. 하지만 그 사랑을 원한 적도, 원하지도 않는다. '신의 사랑'도 반송 가능하냐고 물으면 또 한 소리 들을 테니, 그냥 웃고 넘긴다. 오늘도 그렇게 조용했던 일상은 타인의 ‘사랑’이라는 이름의 침범으로 얼룩진다.

무신론자들은 적어도 논쟁의 태도를 갖는다. 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그 의심의 논리를 개발하며, 과학적으로 반론을 펼치고, 심지어 역사와 권력 구조까지 분석한다. 하지만 '시바한잔해'는 그런 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신에 관심이 없다. 정말이지, 아무런 궁금증도 없다. 신이 존재하든 말든, 내가 피곤한 월요일 아침을 견디는 데 아무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신을 부정하지도 않고, 긍정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 얘기 자체가 지겹고 귀찮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같은 태도가 독실한 신앙으로 축복받은 사람들을 더 불편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신을 거부하면 그래도 대화 상대라도 된다. 그런데 무관심하면? 사람들은 그걸 ‘영적 무기력’이라거나 ‘정신적 폐인 상태’로 규정짓고 싶어 한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나는 그저 평범하게 조용히 살고 싶은데, 그 ‘조용함’조차 허락되지 않는 시대에 산다.


1. 의미 따위 없어도 잘만 살아간다. 대체 왜 그렇게 거창한 걸 찾는가?

'시바한잔해'는 단 한번도 종교를 갖지 않았고, 신에 대한 고민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걸 “생각이 부족한 삶”이라 부르더라. 그리곤 허무하게 느껴지지 않느냐고 묻기도 한다. 정말 진심으로 되묻고 싶다. ‘의미’가 그렇게 중요한가?

삶에 큰 뜻이 없어도, 의미가 없어도, 그냥 습관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소주 한잔하고, 유튜브 보다가 자는 인생. 그게 뭐가 문제인가? 그 안에서 나는 충분히 웃고, 울고, 실망하고, 회복하고, 다시 내일을 산다.

오히려 원치 않는 사람에게 종교적인 삶을 강요하는 세계가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삶을 영적으로 포장하는 그 위선이, 실제로는 아무도 안 지키는 ‘사랑’과 ‘용서’를 외치는 그 허무극처럼, 더 공허하게 들린다. 

신이 없어서 허무한 게 아니다. 그 허무를 무작정 메우려는 태도 자체가 더 불안해 보인다. '시바한잔해'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 모른다. 그런데 그래서 뭐? 인생은 원래 그런 거 아닌가?


2. 구원은 사양하고, 폭력 같은 설교는 피하고 싶다

(적지않게 예의를 차려야 하는 상대에게) 전도를 당해본 사람은 안다. 그게 얼마나 노골적인 설득이고, 얼마나 무례한 침입인지. 그들은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대체로 “네가 영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는 말의 포장이다. 그 말엔 언제나 숨은 위계가 있다.

나는 알고 있고, 너는 모른다.
나는 깨어 있고, 너는 방황한다.
나는 구원 받았고, 너는 길을 잃었다.

솔직히 말하자. 나는 길을 잃지 않았고, 애초에 방향이라는 걸 정한 적도 없다.  오늘 하루 잘 버티는 데 집중할 뿐이다. 누구의 구원도 원하지 않는다. 타인의 감정 상태에 대한 배려도 모르는 이들이 누군가를 '불쌍하다'고 단정짓는다. 이제 그 교만한 사랑에 질릴 대로 질렸다. 당신의 관심에 대해 억지 미소로 감정노동을 해야하는 상대의 기분은 어떤지 아는가?

 

원치 않은 그 모든 감정에서 빠져나오고 싶다. 신의 관심도, 인간의 염려도 필요 없다. 

그냥 다르게 산다는 걸 인정하면 좋겠다는...

 


3. 무신론자는 언쟁이라도 한다. 하지만 난 그냥 피곤하다

무신론자는 신과 싸운다. 유신론자는 신을 옹호한다. 그들은 서로 논쟁을 벌이며, 정체 불명의 진리를 향해 달려간다. 그 열정, 인정한다. 하지만 나에겐 그 모든 게 그냥 시끄럽다. 신에 대해 싸우고 싶지 않다. 그냥 조용히 살고 싶은 사람이다. 신이 있든 말든, 이번주에 로또 당첨 되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하늘에서 구원이 내려온다 해도, 내 월급은 여전히 회사가 주는 것이다. 2025년을 사는 팍팍한 현실 앞에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할 필요도 없다. 궁금하지도 않은 내세를 위해 현세를 원치 않은 길로 틀어버리고 싶지 않다.

무신론자도 유신론자 만큼의 논리를 갖는다. 그런데 나는 둘다 관심없는 무관심론자다.  그래서 더 애매한 존재다. 그래서 더 오해받는다. “왜 생각이 없냐?”고. 하지만 묻고 싶다. 왜 그렇게 ‘신’에 대해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가? 내겐 관심 없는 것도 태도다. 


4. 신이 더 이상 창조되지 않는 이유? 그만큼 심드렁해졌기 때문이다

예전엔 누군가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면 사람들이 따라갔다. 지금은? “야, 그 사람 과거 SNS 좀 뒤져봐.” 현대는 기록의 시대고, 실시간 검증의 시대다. 모든 신은 이제 생방송으로 실수할 가능성이 높다.

우린 더 이상 신화를 기다리지 않는다. 신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 건, 인간이 논리적으로 각성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더 이상 신에 흥미가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 종교영역의 신의 존재가 우리 삶에 중심축이 아니기 때문이다. 축구광에겐 메시가, 농구광에겐 조던이, 돈의 영역에선 머스크가 이미 신을 대체하고 있다. 그 정도의 인간계 신이면 족하다는 거다.

결국, 종교계의 신이 안 먹히는 시대가 온 거다. 시장 논리로 말하면, 모는 신은 이제 구형이 되었다. 왜 스마트폰처럼 새로운 모델의 신은 나타나지 않는건가?


5. 신에 대한 믿음이 없어도, 영적인 의미가 없어도, 그냥 그렇게 산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신이 없으면 인생이 너무 무서울 거라고.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느냐고. 글쎄… 난 오히려 그게 위안이다. 어차피 다 끝날 거라면, 오늘 기분 좋게 한잔하는 것이 더 소중해진다.

신이 모든 걸 보고 있다면, 나는 너무 피곤할 것 같다. 일기장을 누가 몰래 훔쳐보는 느낌. 언제나 평가받는 다는 강박감은 어쩔건가? 지옥이 무서운 게 아니라, 그 지옥을 믿으면서도 차분하게 미소짓는 사람들이 더 무섭다. '시바한잔해'는 단지 그런 세상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고 싶은 사람이다. 


마무리: 제발 나 같은 사람은 그냥 놔뒀으면 좋겠다

나는 신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냥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내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런 태도가 누군가에겐 ‘도발’처럼 받아들여지는 모양이다. 왜 이렇게 다들 열심히 사는가. 왜 그렇게 의미를 찾고, 왜 그렇게 타인의 삶에 숫가락을 담그려 하는가.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은 한 명의 종교 무관심자일 뿐이다. 전도도, 논쟁도, 회개도 관심 없다. 그냥 혼자 밥 먹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망가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을 뿐이다. 그게 왜 그렇게들 불편한가?

왜 자꾸 말을 걸고, 이유를 묻고, 구원을 말하는가?  그냥 아무 것도 믿지 않고 살고 싶다.  그 자유마저 빼앗기면, 이건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엄의 문제다.

신이 당신을 사랑하든 말든, 나는 그냥 오늘 저녁에 뭘 먹고, 무슨 영화를 보고, 휴일에 어느 산에 갈까 고민 중이다. 그게 지금 내겐 더 현실적이고, 더 의미있는 고민이다. 부디, 그마저도 구원하려 들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