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시대에 서로 돕자는 관례가 '사회적 보험 + 눈치 게임'으로 변질
경조사비: 인간관계에 매긴 가격표
(결혼식을 축의금 없이, 장례식을 부의금 없이 치르지 못하는 처지는 이번 잡담의 대상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경조사비란 무엇인가. 답은 애매하지만 과감하게 단정할 수 있다. 이 나라의 경조사비는 결국 '네가 기쁘거나 슬픈 일이 있을 때, 내가 얼마짜리 인간인지 보여주는 가격표'다. ‘경사(慶事)’니, ‘조사(弔事)’니 하며 구분할 필요도 없다. 실상은 돈이 흐르는 시장이다. 진심은 장식품에 불과하고, 본질은 계산이다. 누군가는 (채무처럼) 돈 봉투를 들고 찾아가고 상대방은 무덤덤한 얼굴로 돈 봉투를 받아든다. 그 모든 순간, 인간의 감정은 환전소를 통과한 뒤 비로소 인정받는다.
금액이 애도와 축하를 대신하는 사회. 이젠 얼굴을 보지 않고 계좌이체를 해도 이상하지 않고, 심지어 일부 장례식장엔 부의금을 내는 키오스크도 있다. (심지어 부의금을 카드할부로 할수 있다) 이 얼마나 위선적인 관례인가. 돈 냄새 가득한 이 냉혹한 의식을 이 나라에서는 미풍양속이라 부른다. 참으로 단단하고도 경이로운 집단적 자기기만이다.
경조사가 오늘날처럼 돈의 의식으로 전락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조선시대 농촌 공동체에서는 진정한 상부상조가 있었다.
결혼하는 집에는 쌀과 술을, 상을 당한 집에는 장작과 밥을 보탰다. 물질적 도움이 필요했던 시대, 공동체적 응답은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화폐경제가 스며들면서 쌀 한 되 대신 돈 몇 푼이 오갔고, 진심은 적립과 회수라는 금융 시스템으로 탈바꿈했다.
"내가 지금 얼마를 내놨으니, 언젠가는 받아야 한다."
이 단순한 논리가 인간관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자가 붙지 않는 사채, 담보는 인간관계, 변제는 경조사. 지금도 대다수 한국인은 이 시스템 안에 갇혀 살아간다. 장례식에 가서조차 고인의 삶을 추모하기보다는, "지난번에 걔 결혼할 때 얼마 냈더라?"를 먼저 계산하는 현실. 애도는 들러리다. 돈 계산이 주인이다.

혹자는 반문한다. "한국만 이러냐"고. 천만의 말씀. 중국, 일본도 다르지 않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한국보다 더 노골적이다. 중국에서는 결혼식 초대 자체가 청구서다. 참석 여부는 상관없다. 일단 ‘례금’을 내야 한다. 심지어 누가 얼마를 냈는지 철저히 기록해두고 훗날 철저히 복수하기 위해 명단을 만든다는 이야기까지 돈다.
이쯤 되면 초대장이 아니라 채권 발행장이다. 일본 역시 다를 바 없다. 겉으로는 차분하고 품격을 중시하는 듯 보이지만, 고슈기 봉투에 잘못된 금액을 넣는 순간, '상식 없는 인간'으로 사회적 사형 선고를 받는다. '사회적 매장'이 아니라 차라리 '현실적 매장'이 더 인간적일 것 같은 수준이다. 애도나 축하는 모두 핑계일 뿐이다. 핵심은 돈이다.
동아시아 전체가 인간관계를 경제적 채권-채무 관계로 바라보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 그러나 한국은 그중에서도 특히 왜곡이 심각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경제성장의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기 때문이다. 전통적 공동체 감정이 채 식지도 않았는데, 서구식 개인주의가 자리 잡을 틈도 없이, 돈이 신이 된 사회로 급격히 전환해버렸다.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상부상조"를 외친다. 그러나 내심은 철저한 투자-회수의 논리로 움직인다.
'경조사비'에 국한해서 보자면, 위선은 이제 한국 사회의 기본 언어가 되었다. 경조사비는 더 이상 '마음의 표시'가 아니다. 사회적 보험료에 가깝다. 정확히 말하면, 나중에 회수할 수 있을지 모르는 '연금 적립금'이다. 문제는 이 연금 시스템에 아무런 공식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얼마를 내야 하는지,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금액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인간의 품격이 평가된다는 건 모두가 안다.
봉투를 내밀 때는 조심스럽고, 봉투를 받을 때는 계산적으로 비교한다. 순수한 애정은 자리를 잃고 남는 것은 서로의 장부를 들여다보는 냉정한 눈빛뿐이다. 이 경조사비 시스템이 만들어낸 병폐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우선 관계가 피로해진다.
결혼식, 장례식, 돌잔치, 승진잔치, 별별 이유를 내세워 돈을 요구받는다. 관계는 축복이 아니라 의무가 되고, 사람은 점점 더 고립되어간다. 빈부격차 역시 경조사를 통해 재생산된다.
돈 많은 사람은 많이 내고, 결국 많이 받는다. 돈 없는 사람은 적게 내고, 적게 받는다. 경조사조차 자본주의의 속성 아래서 착실히 빈부를 복제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진짜 인간관계가 무너진다는 점이다. 진심 없는 봉투 교환이 관계를 잠식하고, 결국 우리는 진짜 친구 대신 '가성비 좋은 인맥'을 관리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시스템을 어떻게 끊을 것인가. 간단하다. 안주고 안받으면 되는거다. "경조사에 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사람이 인싸가 되는 시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이 괴상한 관례도 언젠가는 소멸될 것이다. 이럴 땐 5만원, 저럴 땐 10만원이라는 (답도 없는) 고루한 기준은 던져버리고 누구나 부담 없이 주댕이로만 '축하한다', '명복을 빈다'라면서 마음을 전하면 된다.
경조사비는 한때 분명 선한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관계에 매겨진 세금이며, 받을지 못 받을지도 모르는 채권놀이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위선적인 관례을 끝내야 한다. 단순히 돈 문제를 넘어, 진짜 인간관계가 무엇인지를 되찾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경조사비 없는 사회, "돈 대신 마음이 오가는 사회"는 이상이 아니다. 단지 선언하고, 실천하면 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평생 누군가의 경조사 장부에 갇혀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죽을 때조차, 남긴 봉투 액수로 인간성을 평가받는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이보다 더 끔찍한 결말이 있을까.
'허허실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칼도 썩을 ‘물베기’ – 참을 수 없이 유치하고 치졸한 한국 부부 갈등의 민낯 (4) | 2025.05.14 |
---|---|
통장 잔고가 마음의 평안함을 멀리 밀어내길 바라는 푸념 (1) | 2025.05.12 |
“젊은 꼰대가 늙은 꼰대를 닮지 않기를” – MZ 세대와 사토리 세대의 평행이론 (4) | 2025.04.19 |
90대가 즐겁게 사는 6가지 삶의 비결 : 아직도 당신이 곁에 있어서 (1) | 2025.04.13 |
90대, 혼자 남았지만 아직 살아 있는 나 : 삶을 지키는 6가지 비결 (6) | 2025.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