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철없다는 말은 누가 먼저 했는가: 대선 정국에서 드러난 세대 간 ‘정치 꼰대질’의 민낯과 자기모순의 연속성에 대하여

시바한잔해 2025. 5. 31. 17:55

 


1. “철들었냐?”는 질문이 가장 철없는 말이다

– 40대 유권자의 ‘20대를 향한 훈계’가 웃기는 이유
대선을 앞두고 정치판이 뜨겁다. 그런데 정작 투표장 앞에서 가장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는 이들은 국회의사당이 아니라 식탁과 술자리다. 특히 40~50대 유권자들은 요즘 사방팔방으로 지적질이다. 자신들의 정치적 선택이 가장 ‘합리적’이며, 청년세대는 아직도 ‘철이 없다’고 말한다.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러지”, “진보도, 보수도 겪어봐야 알지” 같은 말은 이제 입버릇처럼 튀어나온다. 마치 투표에도 ‘연륜’이라는 자격증이 필요한 양, 20대를 향해 평가질이 끊이지 않는다.
 
40~50대는 보통 사회적으로 가장 '자리잡은' 세대다. 아이를 키우고, 아파트를 대출로 샀고, 승진에 대한 불안과 경력의 끈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나이대다. 그런 이들이 청년층의 정치적 성향을 ‘이상주의’로 폄하한다. 이건 솔직히 말해 ‘꼰대질’이다. 지금의 40대는 20대 시절 노무현을 외치며 광장에 모였고, 박근혜의 국정 농단에 촛불을 들었다. 한때 자신들도 기존 질서를 비판하며 야당도, 여당도 선택 지지하던 사람들이, 어느새 ‘철없다’는 이름표를 후배 세대에게 붙이고 있다.
 
이들의 모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들은 20대가 지지하는 40대 소수정당 후보를 향해 “정권 잡을 가능성도 없는 사람 뽑아서 표 버리지 마라”고 한다. 20대의 관점에선, 기성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대안을 찾으려는 시도인데, “현실을 모르는 철없는 짓”이라 평가한다. 하지만 바로 그들이 지금 지지하는 60대 진보 후보도 예전에는 ‘다음 대안’이라 불리던 인물이다. 오랜기간 동안 '다음'이었는데, 이제는 ‘이번엔 진짜’라고 또 외친다. 이쯤 되면, 도대체 누가 현실 감각이 부족한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20대는 분명 미숙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미숙함은 경험의 부족이지, 사고의 결여는 아니다. 오히려 '이미 겪어봤다'며 사고를 닫아버리는 쪽이야말로 정치적 태만이다. '철없음'을 지적하기 전에, 자신이 철든 줄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2. “치매냐?”라는 조롱이 말하는 치졸함

– 80대 유권자의 선택을 깎아내리는 ‘중년 진보’의 이중성
이번 대선에서 80대 이상의 노년층은 보수 성향의 70대 후보를 강력히 지지하고 있다. 예상된 그림이다. 전통과 안정, 익숙한 질서에 기대려는 경향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장면이 펼쳐진다. 바로 40~50대 중장년층의 반응이다. “군사정권 회귀냐?”, “게엄 옹호하는 노인네들 이제 물러날 때도 되지 않았나?”라며, 노인 유권자들의 선택을 대놓고 조롱한다. “사리분별 못할 나이”라는 비아냥까지 붙는다.
 
이 비판은 겉으로는 정치적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은 연령 차별이다. 80대가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단지 ‘노인이라서’가 아니다. 그들은 한국전쟁을 기억하고, 박정희의 경제성장을 경험했고, 전두환의 만행을 목격했다. 그런 세월을 견디며 정치에 대해 자신만의 시각을 형성해온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경험을 ‘나이 먹어서 정신 못 차림’으로 치환해버리는 이건, 그냥 무례다.
 
무엇보다 문제는, 이 조롱이 진보 성향 유권자에게서 나온다는 것이다. 평소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존중을 외치다가, 자신들의 정치적 기호와 다르다는 이유로 노인들을 집단 조롱하는 건 어떤가? "국민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은, 자신에게 동의할 때만 유효한 것인가?
 
노인들의 선택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이 아닐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선택이 나온 배경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없이 “노망났다”는 프레임을 씌우는 건, 그저 편견과 경멸을 감정적으로 소비하는 것뿐이다. 지지하는 후보의 이념이 아무리 깨끗해도, 그런 태도를 보이는 순간 그 진보성은 껍데기가 된다.


3. 가르치기 바쁜 사회, 이해하지 못하는 국민

– 위아래로 뻗은 정치적 오만과 세대 간 혐오의 구조
한국의 선거철은 단순히 ‘정당 간 대결’이 아니라, 늘 ‘세대 간 전쟁’이 된다. 청년은 중년에게 무지하다고 혼나고, 중년은 노년에게 꼰대라고 손가락질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선택만은 ‘합리적’이라며 자화자찬한다. 정치적 다원성은 말뿐이고, 실제론 모든 세대가 자신보다 아래와 위를 교정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본다.
 
이번 대선은 그 구조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20대는 40대의 꼰대질에 피로감을 느끼고, 40대는 80대를 조롱하면서 스스로는 ‘민주주의의 적자’인 양 군림한다. 심지어 60대 진보 후보를 지지하는 중장년층은, 마치 자신들이 세대 간 가교인 것처럼 착각하지만 정작 윗세대와 아랫세대 모두에게 우월감을 드러내는 데 바쁘다.
 
“우린 그래도 사회경험이 많아서 사람 볼 줄 알아”라며 청년을 무시하는 중년들은 “그 나이 되도록 사람 볼 줄 모르는 건 문제”라며 자신들보다 40년 이상 경험이 많은 노령층을 비웃는다. 이들은 동시에 두 세대를 향해 조롱을 던진다. 위와 아래 모두를 틀렸다고 말하는 이들의 태도야말로, 가장 정치적으로 오만한 지점이다.
 
결국 우리는 ‘다름’을 견디지 못하는 사회 속에 있다. 자신의 정치적 신념은 당당하게 말하면서, 남의 선택에는 ‘무식하다’는 라벨을 붙인다. 세대별 정치 성향이 다른 건 당연하다. 태어난 시대가 다르고, 겪은 사건이 다르고, 바라보는 미래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늘 상대의 배경은 무시한 채, 결과만 놓고 조롱한다. 그 무지가 한국 정치를 고여 있는 늪으로 만든다.


정치는 타협의 예술이다. 그러나 한국 정치의 유권자들은 타협은커녕 서로를 계몽하려 든다. ‘설득’이 아니라 ‘지적질’이 일상화된 이 구조에선, 아무리 대선이 바뀌고 권력이 교체되어도 본질은 그대로일 것이다. 다음 대선에도, 우리는 똑같은 말을 할 것이다.

“쟤넨 아직 철이 없어.”
“저 노인네들은 이제 물러나야지.”
그리고 자신은 ‘가장 이성적’이라고 착각한 채, 또 하나의 꼰대가 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