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윈도 코리아의 서글픈 자화상: 한국이 세계행복보고서 58위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참담한 5가지 이유
한국의 세계행복지수가 올해 58위라는 발표가 나왔다. 가볍게 넘기기에는 무겁고, 깊게 들여다보자니 익숙한 피로감이 몰려온다. 유엔 산하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가 발표한 ‘2025 세계행복보고서’는 GDP, 기대수명, 자유, 관대함, 부패 인식 등 6가지 항목으로 점수를 매겼지만, 결국 질문은 하나다.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 한국인의 대답은 대체로 고개를 돌리며 침묵하거나, 짜증 섞인 한숨이다.
아래에 제시할 5가지 원인은 단순히 통계나 객관지표로는 드러나지 않는,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리적 실측값’에 가까운 해석이다. 행복이 추상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이라지만, 한국 사회가 왜 구조적으로 불행한지를 이해하려면, 사회적 신화와 개인적 감각 사이에 감춰진 균열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1. 돈은 넘치는데 만족은 부족한 '불만족의 경제성장'
한국은 1인당 GDP로만 따지면 이미 선진국 반열에 올라 있다. 하지만 체감되는 삶의 여유는 거의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많이 버는 만큼 많이 써야 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집값, 교육비, 노후 대비, 보험료, 자녀 결혼자금, 심지어 장례비용까지, 모든 것이 계획에 없던 재정적 리스크로 다가온다.
경제성장의 과실이 분배되지 않고, 오히려 고비용 생존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불안한 풍요’가 지배한다. 국민소득은 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남기 위해 돈을 번다.’ 이건 행복을 위한 경제가 아니라, 불행을 피하기 위한 사투다. 이 나라의 성장 모델은 국민의 심리적 여유를 철저히 외면한다. 돈이 행복의 필요조건이 아니라고 말하는 건, 돈이 충분한 자들의 낯간지러운 위선이다. 한국에서는 ‘충분한 돈’ 자체가 신기루다.
2. 공감 없는 사회적 연대, ‘타인의 불행은 나의 안도감’
행복지수 산정 항목 중 하나는 ‘사회적 지원’이다. 위기 상황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를 묻는다. 이 간단한 질문 앞에서 한국인은 멈칫한다. 가족은 있지만 도움은 안 되고, 친구는 있지만 연락은 뜸하며, 공동체는 있지만 신뢰는 없다.
한국은 타인의 고통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심리적 안정을 취하는 사회다. ‘그래도 쟤보단 낫지’라는 비교 위에 선 상대적 위안. 이러한 문화는 연대를 가로막는다. 타인의 성공은 위협이 되고, 실패는 쾌감이 된다. ‘남의 불행’이 ‘내 행복’이 되는 역설적인 심리구조 속에서 공동체는 기능을 잃는다. 결국, 사회적 지원이란 이름의 허상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견제하고 외면한다. 그 누구도 진심으로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사회'에서 행복은 사치다.
3. 자유의 탈을 쓴 강박: 선택할 자유가 아니라, ‘선택당할’ 불안
행복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로 ‘자유’를 꼽는다. 하지만 이 자유는 단순히 정치적 자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문제는 ‘선택의 자유’가 ‘선택지의 압박’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고교부터 대입, 전공, 취업, 결혼, 육아, 노후까지. 인생의 거의 모든 국면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
선택은 제도와 관행이 하고, 개인은 그 지시를 수행할 뿐이다. 자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모든 선택은 ‘정해진 정답’이 존재한다. 거기서 벗어나면 탈락이고 낙오다. 이른바 ‘성공 루트’에서 벗어났을 때 돌아오는 것은 조롱, 고립, 자책이다. "네 인생은 네가 선택한 거잖아"라는 무책임한 담론이 사람들의 숨통을 조인다. 진정한 자유는 실패할 자유를 포함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자유는 성공을 강요하는 또 다른 감옥이다.
4. 관대함은 사라지고, ‘형벌 감정’만 남은 사회
보고서에 따르면 '관대함'도 행복의 중요한 요소다. 한국은 여기에 특히 인색하다. 이 사회는 누군가의 실수나 실패에 대해 유난히 냉혹하다. 한 번의 실수로 사람을 매장하고, ‘공인’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사생활을 탈탈 털며, ‘정의’라는 이름으로 끝없는 린치를 가한다. 이른바 '정의 중독' 사회다.
사회 전체가 분노를 소비하고 있으며, SNS는 이 분노를 확산시키는 증폭기다. 타인에게 관대하지 못한 사회는 자신에게도 관대하지 못하다. 스스로의 실수나 한계를 용납하지 못하는 완벽주의와 자학은 자살률 1위라는 비극적 성적으로 이어진다. 이 사회는 관대함을 ‘약함’으로 여기고, 용서를 ‘패배’로 간주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벌 받을 각오’를 하며 살아간다. 그런 삶이 행복할 리 없다.
5. 부패는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화된 시스템’
마지막 기준인 ‘부패 인식’은 단순히 정치적 부패에 대한 느낌만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뿌리 깊은 ‘불공정’에 대한 체념이 존재한다. 노력보다 줄이 중요하고, 능력보다 배경이 앞서며, 공정한 경쟁이라는 말은 입시 브로슈어나 채용 홍보영상에만 존재한다.
사람들은 이제 부패를 문제 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부패는 ‘관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 아는 게임의 룰인데, 그걸 지적하는 것은 ‘순진한 짓’이 되었다. 이 부패는 ‘특권층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의 모든 층위에 스며든 ‘관계 기반 시스템’이다.
아파트 청약, 병역, 입시, 취업, 승진, 심지어 사법체계까지, 모든 과정에 ‘눈치’와 ‘인맥’이 작동한다. 이건 단순한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적 불신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냉소가 퍼져 있을 때, 사람들은 ‘행복’을 묻는 질문 자체에 짜증을 낸다.
맺으며: 행복이 아닌 생존을 위한 나라
한국 사회는 지금 ‘행복’이라는 단어에 거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그딴 게 밥 먹여줘?”라는 반문이 돌아올 만큼, 행복은 사치로 전락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치를 꿈꾸는 것조차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핀란드가 1위인 이유는 단지 복지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신뢰, 실패를 수용하는 사회적 유연성, 경쟁이 아닌 공존의 문화가 핵심이다.
한국은 왜 행복하지 않은가? 그 답은 너무 뻔해서 지겨울 정도다. 우리는 짦은 시간에 너무 많은 걸 이룩했지만, 너무 많은 걸 놓쳤다. 물질은 급속하게 넘쳤지만 정서도 그만큼 빠르게 말랐다. 선택은 늘었지만 자유는 줄었다. 관계는 많아졌지만 연대는 사라졌다. 이런 나라에서 58위는 오히려 과한 점수다. 문제는 우리가 그 순위에 별로 놀라지 않고 수긍한다는 사실이다. 무관심은 가장 완전한 체념이다. 그리고 체념한 자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