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푸어’는 허세가 아니다 – 조롱의 사회에서 자존심을 소비하는 사람들을 위한 잡담
1. “카푸어”에 대한 조롱의 본질은 자기혐오다
한국 사회에서 ‘카푸어’라는 단어는 이제 하나의 낙인이 되었다. ‘허세’, ‘무리수’, ‘경제 관념 없는 놈’—그 뒤에 붙는 수식어들은 놀랍도록 잔혹하다. 고가의 수입차를 끌고 다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사람의 재정 상태를, 인생의 선택을, 그리고 존재 가치까지 재단한다. 그리고 대체로 그 조롱은, 자신은 그런 선택조차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나온다.
이런 조롱의 본질은 ‘우월감’이 아니라, 자기혐오의 투사다. “나는 감히 못 하는데, 쟤는 왜 해?”라는 질투심과, “나는 현실을 참고 사는데, 쟤는 왜 멋대로 살아?”라는 억울함. 조롱하는 이들은 ‘현명함’이라는 가면을 쓰지만, 실제로는 용기 있는 타인을 짓밟음으로써 자신의 무력감을 달랜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의 자존심과 허영심을 안고 산다. 문제는, 그걸 차에 실었느냐 옷에 걸었느냐, 얼굴에 주사했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2. "그 돈이면 씨바 BMW 사지" – '그돈씨'는 조롱이 아니라 선동이다
‘그돈씨’. “그 돈이면 씨바 OOO을 사지”라는 줄임말이다. 표면적으로는 합리적 비교다. 예컨대, “G80 살 돈이면 BMW 5시리즈를 사지.” 일견 맞는 말 같지만, 사실은 가장 악질적인 형태의 소비 유도다. 사실상 그들은 차를 비교할 만한 최소한의 전문적인 지식조차도 없고, 숏폼에 가스라이팅 당한 경우가 다반사다.
‘그돈씨’는 실용과 실리를 우선한 선택을 ‘못난 선택’으로 몰아세우고, 더 비싸고 눈에 띄는 것을 사야 한다고 자극한다. 그렇게 유혹당한 소비자가 빚을 내어 외제차를 몰고 나오면, 그때부터는 “쟤는 카푸어야, 제정신 아냐”라는 조롱이 시작된다.
이것은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다. 이 사회가 개인에게 '이중구속(double bind)'을 강요하는 방식의 축소판이다. 멋지게 살라고 부추겨놓고, 멋지게 살면 무리한다고 비난한다. "해라, 하지만 하면 안 된다"는 잔혹한 함정. 이런 구조 속에서 소비자는 멋을 내는 동시에, 늘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3. 연봉 4천 사회초년생 A와 B – 누가 더 위험한가? 누가 더 만족하는가?
조금 더 구체적인 예를 보자. 연봉 4천만원인 사회초년생 두 명이 있다. A는 3천만원대 국산 중형차를 구입했다. 현실적인 선택이다. 차량 구매에 있어 월 할부금과 유지비를 포함하면 약 50~60만원 선으로, 전체 소득에서 부담되는 비율은 낮은 편이다. A는 어느 정도의 이동 편의성과 체면을 챙기면서도 통장 잔고를 유지할 수 있는 선택을 한 셈이다.
반면 B는 9천만원에 달하는 수입차를 계약했다. 초기 납입금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매달 130~150만원이상의 할부금와 보험료, 유지비가 B의 통장을 크게 갉아먹는다. 재정적으로 보면 매우 무리한 소비다. B의 통장에 남는 돈은 얼마 없고, 저축이나 투자 여력도 쪼그라든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B는 그 대가로 무엇을 얻는가?
놀랍게도 많다. 우선, 매일 아침 출근길에 느끼는 자존감. 동료나 선후배의 시선에서 오는 묘한 자신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드는 “나는 뭔가 이룬 것 같다”는 작지만 풍족한 감정. 이건 단순한 ‘허영’이 아니다. B는 차를 통해 자기 서사를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A는 안정적이다. 하지만 회식 자리에서 또래들끼리 차 이야기가 나오면 느끼는 그 어중간한 감정. 충분히 현명하고 적절한 선택이었지만 특별하지는 않은 차. 그 소소한 회피의 결과물이 아쉬움을 만든다.
결국, 누가 더 옳은 선택을 한 걸까? A는 재정적 안정, B는 심리적 만족.
우리는 자꾸 A가 옳고, B는 미련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정답은 없다. 단지 그들이 받아야 할 것은 조롱이 아니라 존중이다. 각자의 선택에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우리가 감히 평가할 수 없는 고유한 맥락 위에 있다.
4. 성형은 힐링, 차는 허세? – 소비의 이중잣대를 해체하라
한국 사회는 성형 수술에 대해 점점 더 관대해졌다. “자기만족이잖아”, “자신감을 찾기 위해서”라는 말이 통용된다. 실제로 외모 개선을 통해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 왜, 자동차를 통한 자기만족은 ‘허세’로 낙인찍히는가?
이건 순전히 사회가 허락한 소비와 그렇지 않은 소비의 차이다. 성형은 ‘자기관리’로 포장되고, 차는 ‘과시’로 낙인찍힌다. 하지만 본질은 같다. 둘 다 자기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행위다.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를 보상하며 살지 않으면 무너진다. 어떤 이는 피부과에, 어떤 이는 골프채에, 그리고 어떤 이는 자동차에 돈을 쓴다. 문제는 선택이 아니라, 그 선택을 도덕으로 재단하려 드는 사회의 태도다.
5. 차는 계급이 아니다. 몰입은 인격이다
자동차는 계급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동차에 진심인 사람을 '미성숙하다'라는 식으로 단언하는 것은 큰 실례다. 우리는 누군가의 소비 방식, 취향, 관심사에 대해 너무 쉽게 평가한다.
“쟤는 차에 너무 빠졌어”
그 말의 저변엔 “나는 그렇지 않으니 더 성숙해”라는 자의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그건 자기애의 투사일 뿐이다. 차든 그림이든, 캠핑 장비든, 어디에 몰입하든 그건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이다.
누군가 BMW나 벤츠를 사기 위해 3년을 무리하는 게 그렇게 한심한가? 그 사람이 한 치의 후회 없이 그 차를 탈 수 있다면, 그게 곧 그 사람의 방식이다. 그걸 무너뜨리는 조롱은 단지 자기 방식에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타인의 방식을 위협하는 것일 뿐이다.
마무리: 조롱은 쉽다, 이해는 어렵다
‘카푸어’라는 말이 성립하려면, 그가 진짜로 경제적 파산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 하지만 현실의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조금 무리를 했고, 조금 비싼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 선택은 고통일 수도 있고, 자존감일 수도 있다.
우리는 남의 지출 방식에 대해 너무 많은 말을 한다. 차에 돈 쓰는 사람을 욕하기 전에, 당신은 어제 어디에 돈을 썼는가? 30만원짜리 술자리에, 200만원짜리 명품가방에, 한 달 월급을 날린 여행에—그건 과연 합리적 소비인가? 아니면 그냥 당신에게 익숙한 소비인가?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소비는 죄가 아니다. 조롱은 쉽지만, 이해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