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 한국 자본주의가 길러낸 집단적 위장병

시바한잔해 2025. 5. 13. 17:23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 한국 자본주의가 길러낸 집단적 위장병
 
한국 속담 중 유독 뼈아프게 현실을 꼬집는 말이 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이 문장은 단순한 질투를 넘어, 한국 사회에 만연한 타인 중심적 비교 의식, 그것도 타인의 ‘성공’을 고통으로 체화하는 괴상한 심리적 구조를 보여주는 자화상이다. 심지어 이 속담은 이제 미풍양속의 경구라기보다, 대한민국이라는 경쟁 지옥을 정의하는 하나의 문화 코드로 자리 잡았다.

 

1. 배고픈 건 참아도, 배아픈 건 못 참는다 – 자본주의적 위선의 정체

 
“배고픈 건 참아도, 배아픈 건 못 참는다”는  어처구니 없는 비교가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사회의 도덕적 구조가 얼마나 일그러졌는지를 보여준다. 단순한 조크? 생존과 직결된, 즉 ‘배고픔’의 고통을 빗댄 농담을 가볍게 받아 들이라고? 
 
자극적인 풍자로 넘기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그 심각성의 중심엔, 타인의 성취가 나보다 앞서가는 것을 ‘감내하지 못하는’ 심리가 있다. 공허한 배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옆집 친구의 자식이 SKY에 붙었다는 소식이다. 여기서 한국 자본주의의 민낯이 드러난다. 우리가 추구하는 건 ‘절대적’ 생존이 아니라, ‘상대적’ 우위다.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보다 더 많이 가진 상태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 곧 자존감의 원천이다.
 
한국의 자본주의는 애초부터 공정하지 않았다. 민주적 개념이 실종된 채로 시작된 산업화, 재벌 중심 경제, 헬조선이 되기까지의 역사에는 늘 ‘내려찍히는 자’와 ‘기어오르는 자’가 있었다. 승자는 많지 않지만 패자는 언제나 많다. 그런 가운데 자본주의는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보는 감정을 동력으로 삼는다. 질투와 시기는 곧 광고가 된다. 옆집 사촌이 차를 바꾸면, 나도 할부로 끌고 와야 속이 풀린다. 이 악순환은 한국 경제의 엔진이다. 배아픔은 이 사회를 굴러가게 만드는 연료다. 그러니 사람들은 기꺼이 배고픔 따위는 비교대상이 안되는 것이다. 남보다 뒤처지는 모욕감을 견딜 수 없다면, 그 어떤 고통도 각오해야 하니까.

 

2. 가까운 자일수록 더 아프다 – 심리의 적대 구조

 
질투는 멀리 있는 대상을 향하지 않는다. TV 속 재벌가 3세의 성공에 배가 아픈 사람은 없다. 그러나 동창회에서 본 고등학교 친구가 외제차를 몰고 나타나는 순간, 눈동자가 흔들린다. 왜 그럴까? 인간은 자신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을 기준점으로 삼는다. 내가 이 녀석보다 공부를 잘했는데, 내가 이 놈보다 착했는데, 내가 이 쉐끼보다 더 성실했는데...
그런데 왜 ‘저 인간’이 나보다 더 잘살고 있나? 이건 단순한 질투가 아니라 정의에 대한 분노로 위장된 감정이다.
 
한국 사회는 ‘공정’이라는 말을 매우 사랑하지만, 실제로는 공정에 대한 정의가 개인마다 다르다. 특히 가까운 사람의 성공은 나의 실패를 더 선명하게 만든다. 마치 도플갱어가 성공한 세계에서 나만 실패한 세계에 있는 듯한 심리적 괴리가 발생한다. 비슷했던 출발점이 다른 도착점에 도달했을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불공정을 의심한다. 그 의심은 자책보다 먼저, 타인을 향한 시기로 전이된다. 결국, 친척이나 친구, 사촌이 성공할수록 사회적 관계망은 더 빨리 부식된다. 한국식 가족주의는 피보다 돈이 진하다는 걸 증명한 지 오래다.

 

3. 왜 건강한 이웃은 부럽지 않은가 – 질투의 시장가치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은, 사람들은 타인의 성공에는 민감하지만, 타인의 건강에는 관대하다는 것이다. 옆집 아저씨가 대기업 부장으로 승진했다는 소식은 뒷담화로 이어지지만, 그 아저씨가 마라톤을 완주했다는 소식은 대개 “대단하네” 정도로 끝난다. 왜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건강은 경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자본주의는 '비교 가능한 성공'에만 가치를 부여한다. 재산, 직위, 자식의 대학, 차량 브랜드 등은 수치화가 가능하고 비교가 용이하다. 하지만 건강은 그렇지 않다. 누구든 건강해도 되고, 건강이 좋다고 해서 나의 지위가 위협받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건강은 사회적으로 '노력'보다 '운'의 요소가 크다고 여겨진다. 그러니 타인의 건강은 시기의 대상이 아니다.
 
시기는 본능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훈련시킨 비교의 기술이며, 수치로 계산되는 성공의 영역에만 적용되는 감정이다. 건강은 화폐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이기 때문에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고, 따라서 시기의 대상에서도 벗어나 있다. 우리는 건강한 사람을 칭찬하면서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대신, 돈 많이 번 사람에게는 칭찬보다 비난과 의심을 먼저 건넨다. 이건 문화가 아니다. 이건 질투의 경제학이다.

 

4. 입시지옥이 낳은 ‘성공 혐오’

 
한국인의 타인 성공에 대한 과도한 예민함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답은 뻔하다. 입시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사람을 줄 세우는 사회에서, 경쟁은 호흡처럼 자연스러워진다. 시험 성적은 나의 가치를 매기는 공인된 지표였다. 이 순위표는 고등학교 내내 유지되었고, 수능을 거쳐 대학을 지나 사회생활까지 이어졌다.
 
특히 한국의 입시는 ‘절대평가’가 아니라 ‘상대평가’다. 내가 90점을 맞아도, 남들이 95점을 맞으면 나는 뒤처진다. 그러니 타인의 성공은 곧 나의 실패다. 이런 구조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타인이 잘될수록 위협을 느낀다. 성공은 희소하고, 남의 몫이 늘어나면 나의 몫은 줄어드는 제로섬 게임의 정서가 몸에 배어 있다.
 
게다가 입시는 실력만이 아니라, 부모의 재력과 정보력, 사교육 투자 능력에 의해 좌우된다. 따라서 타인의 성공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운 좋은 금수저의 잔치’로 보인다. 이런 불신은 사회 전반으로 퍼져, 이제는 어떤 성공도 선의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성공은 부정한 방식으로 얻었을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본다. 이쯤 되면 질투는 정당화되고, 비난은 정의가 된다. 우리는 그렇게 입시 경쟁 속에서, 남의 성공을 저주하는 것이 ‘합리적’인 사회를 만들었다.

 

5. 자극인가 무관심인가 – 살아남는 법에 대하여

 
그렇다면 타인의 성공에 자극을 받아 열심히 사는 게 좋은가, 아니면 무관심하게 사는 게 더 현명한가? 이 질문은 결국 ‘인간다움’과 ‘생존의 기술’ 사이에서 선택하라는 요구다.
 
타인의 성공을 자극으로 삼는 삶은 분명 발전을 낳는다. 인간은 경쟁을 통해 진보해왔다. 남이 1등을 하면, 나도 노력해서 2등이라도 하겠다는 마음은 에너지다. 그러나 그 자극이 질투로 변질되면, 타인의 실패를 바라는 심리로 전락한다. 이는 자기 발전이 아니라, 타인의 몰락에 기생하는 기형적 자아를 낳는다.
 
반면, 무관심하게 사는 사람은 평화롭다. 남이 뭘 하든, 나는 나의 속도로 걷는다. 그러나 이 무관심은 때때로 자기합리화의 피난처가 된다. ‘나는 저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아’라는 말은 때로는 철학이지만, 때로는 패배자의 자기위안이기도 하다. 무관심은 열등감의 방어막으로 쓰일 수 있다.
 
결국 정답은 없지만, 하나의 진실은 있다. 남의 인생을 줄자로 삼아 내 삶을 재는 순간, 우리는 절대 만족할 수 없다. 사촌이 땅을 사든 우주를 사든, 그건 그 사람의 일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 배가 왜 아픈지를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것이 건강한 경쟁이고, 그것이 진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이다.


땅 사는 사촌을 축하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타인의 성공이 곧 나의 상처가 되는 사회는 병들었다. 우리가 지금 앓고 있는 배앓이는 단순한 질투가 아니다. 그것은 구조적 불공정과, 끝없는 비교 속에서 찢긴 자아의 고통이다. 하지만 그 고통을 ‘축하’로 승화시킬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성숙한 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 사촌이 땅을 샀다는 소식을 듣고, “그래, 잘 됐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이 삐뚤어진 자본주의에서 진짜로 해방된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