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 잔고가 마음의 평안함을 멀리 밀어내길 바라는 푸념
돈이 심리적 안정을 살 수 있는가?
1. 통장에 찍힌 숫자와 가슴에 남은 불안
돈이 중요한 사람들은 통장에 찍힌 숫자가 늘어나면 마음이 편해질 거라고 믿는다. 그 믿음은 일종의 사회적 최면에 가깝다. (한국인들은 부정하겠지만) 현실은 다르다. 매달 카드값,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은 분명 안락함을 제공하지만, 그것이 ‘평온’이라는 심리 상태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뻔한 말이지만, 경제적 안정이란 결국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이다. 기본적(?)인 생활비 걱정이 없고, 병원비를 감당할 수 있으며, 미래의 갑작스런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능력. 이 정도면 경제적 안정이라 부를 수 있다. 문제는, 그 안정이 우리를 실제로 ‘편안하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심리적 평온함은 숫자와 다른 논리로 작동한다. (만약, 이 논리를 밝혀내는 학자가 있다면 노벨상 3개는 받아야 할 것이다. 경제학상, 평화상, 생리/의학상 까지) 암튼간에, 30억이 있어도 불안한 사람은 불안하고 3천만 원으로도 담담하게 사는 사람은 나름의 방법으로 평온하게 살기도 한다.
2. 10억 있으면 편할까?
흔히들 말한다. “X억 정도 있으면 인생이 좀 편해질 거야.” 당신에겐 X가 10억인가? 아니면 100억? 그 기준은 자신의 처지에 따라서 고무줄처럼 늘어나기도 하지만, 한국 사회에는 그 돈만 있으면 마치 인생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듯이, 일종의 해방구의 팻말처럼 떠돈다. 서울에 집 하나, 자녀 교육비, 노후 준비까지. 이 모든 걸 커버하기 위한 금액처럼 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적인 계산일 뿐이다. 인생은 엑셀이 아니라 변수 덩어리다.
설령 100억이 있다 해도, 그건 시작일 뿐이다. 그 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어떻게 불려야 할지, 세금은 어떻게 감당할지, 하루아침에 생기는 걱정거리들이 있다. 더 중요한 건, 그 정도 자산을 가지게 되는 순간부터 ‘잃을 수 있는 무엇’이 생긴다는 점이다. 그리고 인간은 잃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존재다. 결국 100억은 어떤 사람에게는 ‘자유’이지만, 대부분에게는 ‘불안의 진입 티켓’일 뿐이다.
3. 돈 많아도 불안한 나라, 대한민국
한국 사회에서 돈은 존재 그 자체라기보다, 다른 사람보다 ‘위에 있는 상태’를 증명하는 도구다. 그래서 돈을 벌었다고 해도 안심할 수 없다. 내 집이 있어도 강남이 아니면 모자란 느낌이고, 차가 있어도 외제차가 아니면 기가 죽는다. 이런 사회에서 심리적 안정은 남과 비교하지 않는 태도에서 나오지만, 그것이야말로 가장 희귀한 품목이다.
문제는, 이 비교의 체계가 사람을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불안은 자산이 커질수록 더 복잡해진다. 돈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나보다 더 있는 사람을 보면 불편해지고, 더 없는 사람을 보면 위로받는다. 그래서 부유한 사람일수록 불안하다. 불안은 ‘절대액수’가 아니라 ‘상대위치’에서 오기 때문이다.
4. 돈이 많으면 더 불안한 이유
돈이 많다는 건 단지 소비할 수 있는 여유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지켜야 할 것’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누군가에게는 1억짜리 소비여유가 생기지만, 부자에겐 1억짜리 위기가 된다. 자산이 많아질수록 인생은 공격이 아니라 방어 게임으로 전환된다. 자산을 보전하기 위해 세무사, 투자사, 법률 자문과 상의하며 하루를 보낸다. 삶은 풍요로워지는 게 아니라 점점 ‘관리’로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돈이 많으면 사람을 의심하게 된다.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인지, 내 돈을 노리는 것인지, 경계심이 앞선다. 인간관계는 계산적으로 흐르고, 평범한 대화마저 긴장을 동반한다. 돈은 사람을 바꾸지 않지만, 사람을 보는 시선을 바꾼다. 너무 극단적인 선입견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부자가 아닌게 확실하다. 믿거나 말거나 그렇게 부자는 고립되고, 고립은 또 다른 불안이 된다.
5. 심리적 평안에 필요한 것들 – 돈이 아니라 바로 이것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심리적 평안은 어디서 오는가? 돈이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통해 평안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 조건은 단순하면서도 얻기 어렵다. 무작정, 지극히 주관적으로 다섯 가지만 추려본다.
- 신뢰할 수 있는 관계
누군가를 진심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다는 안도감은 돈이 줄 수 없는 안정감을 제공한다. - 자기 효능감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스스로의 삶을 조절할 수 있다는 확신은 불안함을 줄이는 강력한 힘이다. - 건강한 몸
몸이 편하면 마음도 편하다. 반대로 몸이 아프면, 그 어떤 안정도 무너진다. 건강은 평안을 누리기 위한 선조건이다. - 통제 가능한 일상
내일의 일이 예측 가능하고, 반복 가능한 일상이 유지될 때 인간은 안정을 느낀다. 돈보다 중요한 건 ‘패턴’이다. - 존엄성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 그리고 타인에게 무시당하지 않는 삶. 그것이 없으면, 어떤 재산도 허망해진다.
결론: 돈은 불완전한 충분조건이다
돈은 분명히 중요하다.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고, 어느 수준 이상에서는 인간의 삶을 덜 고달프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돈은 도구일 뿐,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문제는 지금 우리가 그 도구를 ‘신앙’처럼 숭배하고 있다는 데 있다. (믿거나 말거나, 지구상에서 돈을 절대가치로 추구하는 나라는 바로 한국이다.)
경제적 안정은 단기적으로 사람을 지탱할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인간을 지탱하는 것은 관계, 의미, 건강, 자존감이다. 돈으로 다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들은 거래되지 않는다. 그걸 아는 사람은 돈이 많아도 불안해하지 않고, 그걸 모르는 사람은 돈이 적어도 계속 불안해한다. 문제는 우리가 후자의 인생을 더 자주 살아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