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장난의 제국, 대선 TV토론을 말한다 – 아무도 믿지 않는 쇼를 왜 보고 있는가
대통령을 뽑는다는 일은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선거다. 토가 나올 정도로 비열하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한국에서 자신과 가족의 삶을 돌봐야 하는 사람들은 기꺼이 시간을 내어 투표장에 간다. 그들은 기대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이상한 끌림으로 움직이고, 희망보다는 '그래도 저 인간은 아니니까'라는 최소한의 기준으로 표를 던진다. 그렇게 5년마다 한 번, 우리가 가진 유일한 통제 수단이자 민주주의의 상징인 투표를 해왔다.
이제 그런 중요한 투표를 앞두고 있다. 황당하게도 예정에도 없던 선거라서, 당연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의 너저분한 후보들이 TV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시작부터 실망이다. 누가 더 나은 '지도자감'인가를 놓고 경쟁하는 것 보다, 누가 더 덜 구역질나는가를 두고 고르라는 듯한 토론이 계속된다. 이런 저질쇼가 무슨 의미인가?
1. 세대차를 넘어선 토론? 아니, 불통과 착각의 공명일 뿐
40대부터 70대까지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았고, 서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권력과 대중을 경험해온 이들이 마치 같은 언어를 쓴다는 착각 속에 토론을 벌인다. 하지만 이건 토론이 아니다. 시대 인식의 간극은 메꿔지지 않고, 사회에 대한 이해는 조각나 있다.
한쪽은 1980년대의 슬픔과 고통을 반복해서 호소하고, 다른 후보들은 2025년의 AI를 붙잡고 있다. 또 어떤 후보는 분노정치를 여전히 무기로 삼는다. 이들이 지금 2025년에 무슨 해법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인가?
이질적인 세대, 이질적인 배경, 이질적인 언어와 태도를 가진 자들이 건설적인 토론을 할 수 있으려면 공통의 프레임이 먼저 필요하다. 그러나 TV토론은 그 프레임을 설정하지 않는다. 패널들은 존재감 없는 중재자일 뿐이며, 언론사는 시청률이 될 만한 충돌을 유도한다. 질문은 광범위하고, 시간은 짧고, 답변은 늘 회피와 반복으로 점철된다.
대안은 간단하다. 주제별 토론과 사실 기반 검증을 분리하고, 사회적 합의를 전제로 한 사전 프레임 설정이 필요하다. 예컨대 “부동산 정책”이라면 실현 가능성과 재정 추계가 검증된 정책만 갖고 토론 해야 한다. 그래야 후보들의 통찰력과 추진의지를 상대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처럼 공허한 구호, 헛소리, 그리고 추억팔이의 향연이 반복될 뿐이다.

2. 조롱과 비아냥, 그리고 자기비전 없는 정치적 기생충들
한국의 대선 TV토론을 보면 항상 드러나는 특색이 있다. 어떤 후보는 질문에 앞서 상대의 발언을 왜곡하고, 단어 몇 개를 짜깁기해서 엉뚱한 프레임을 씌운다. 논점을 비틀고, 맥락을 제거한 채 조롱조의 말장난을 던진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상대를 설득하려 하지 않고, 시청자를 존중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진영에게 “봐라, 내가 저놈 한 방 먹였다”는 인상을 주면 그걸로 끝이다.
왜 그럴까? 자기 정책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비전이 없으니 공격에 몰두하고, 정책이 빈약하니 언어의 유희로 승부한다. '네거티브'는 유능하지 못한 자가 최후에 택하는 무기다. 그러나 이 무기가 지금은 전략이 아니라 본능처럼 작동한다. 너무 오래 정치판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교활한 생존방식일 뿐이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국민이 아니라 지지층의 이탈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허점만 파고들고, 자신의 허물은 “그때 상황이 달랐다”는 말로 덮는다. 이런 태도야말로 국민을 진정 무시하는 행위다. 대한민국 유권자는 결코 우둔하지 않다. 그들은 단지 선택지가 실망스러워서 외면하는 것이다. 조롱으로 토론을 채우는 후보는 지도자가 아니라 정치적 기생충이다.
3. AI처럼 유창해야 자질이 있는가?
TV토론에서 누군가는 우물쭈물한다. “그건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라는 말을 꺼내면 곧바로 무능하다는 낙인이 찍힌다. 반면, 어떤 후보는 유창하다. 막힘없이 말한다. 그럴싸한 단어를 섞고, 질문의 방향을 바꿔치기한다. 논리적 일관성은 없고, 근거는 얄팍하지만 언변으로 몰아붙인다. 그러면 사람들은 박수를 친다. “역시 말발은 최고다.”
그런데 대통령에게 필요한 자질은 말발인가? 누군가 질문에 답을 못하는 건 생각의 깊이 때문일 수 있고, 말이 빠른 건 경박하거나 습관적 사기일 수도 있다. AI처럼 유창한 언변이 진정한 자질이라면, 우리는 이미 GPT에게 투표권을 줘야 할지도 모른다.
토론은 쇼가 아니라 증명이다. 말을 잘한다는 건 유능하다는 증거가 아니라, 착각을 유도하는 연기일 수 있다. 국민은 그 말 뒤에 숨어 있는 의도와 실제 이력, 실행력을 봐야 한다. “말 잘하는 후보”가 아니라 “말에 책임지는 후보”를 골라야 한다.
4. 지지율이 낮은 후보의 토론 집착, 전략인가 악수인가?
여론조사는 냉정하다.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 누가 봐도 승산 없는 싸움 속에서 지지율이 낮은 후보들이 공중파 토론에 목숨을 건다. 어떤 이는 “이제야 기회가 왔다”며 말한다. 그들은 마지막 생존 본능으로 전면에 나선다. 하지만 대다수 유권자에게는, “쟤는 왜 저렇게 발악을 하지?”라는 피로감만 남긴다.
토론에 몰입하는 후보의 절박함은 이해된다. 하지만 그것이 공약을 펼치는 장이 아닌, 상대를 공격하는 무대로 변질되면 결국 '시간 낭비', 혹은 '전파 낭비'라는 비판만 남는다. 이미 승패가 갈렸다고 판단되는 선거판에서는 토론의 진정성이 의심받기 쉽다. 후보가 자기 존재감을 부각하려면, 차라리 이기지 못해도 국민에게 필요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유일한 전략이다.
지지율 낮은 후보는 국민의 눈을 사로잡기 위한 진지함과 통찰력을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들러리'라는 인식만 강화될 뿐이다. (아니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업그레이드 하려는 얄팍한 수작일수도...)
5. 정치인은 다른 세계 사람들, 국민이 중심을 잡아야 하는 이유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르다.” 이 고전적인 표현은 왜 정치판에서는 늘 정확히 맞아떨어지는가? 공약은 늘 장밋빛이다. 그러나 당선된 그 순간부터, 현실의 장벽이라는 이름으로 약속은 '재검토', '보류', '상황 변화'라는 말로 둔갑한다.
문제는 그 약속을 던진 자들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권력을 쥐는 순간, 다른 세상 사람이 된다. 관용차와 경호원에 둘러싸이고, 국민의 삶을 데이터로만 접하는 자들이 된다. 권력이 바뀌어도 국민의 고통은 그대로고, 공약은 종이쪼가리로 사라진다.
그렇다면 국민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하나다. 국민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 정치인은 믿을 대상이 아니라 감시의 대상이다. 토론에서 말이 달콤하다면, 우리는 더욱 의심해야 한다. 그리고 당선 이후의 실천을 요구하며, 정기적으로 그들을 불러세워야 한다. 그게 진짜 민주주의다.
TV토론을 보며 짜증이 나는 건 단순히 수준 낮은 언변 때문이 아니다. 그 말들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뻔한 쇼를 우리는 또 봐야 한다. 그래도 기억하자. 권력은 믿는 것이 아니라 견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천박하고 지독한 말장난이 판치는 '대선쇼'에서 중심을 잃지 않는 유일한 존재는, 바로 국민 자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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